‘노동- 효과(성)’를 보는 눈
김옥렬(미술평론/독립큐레이터)
김결수의 작업은 삶의 현장에서 버려진 잔해(object)를 통해 노동(labor)-효과(성) (effectiveness)를 발견하는 것이다. 노동효과를 발견하기 위해 전제된 오브제의 조건은 주로 도시건설 현장의 폐기물인 고철이나 들보 재목 그리고 반복된 노동의 흔적이 담긴 나무도마 등이 그의 작업 대상(object)이 된다. 삶의 현장에서 발견된 낡은 오브제는 노동효과에 대한 흔적 찾기인 동시에 긴 시간 반복되었을 노동 가치에 대한 질문이다. 노동효과가 화려한 도시의 외관이라면, 그 가치에 대한 질문은 화려한 외관에 가려진 노동의 그림자가 아닐까.
노동의 흔적을 발견하기위해 산업현장의 폐기물을 작업의 제재로 사용한다는 면에서 어쩌면 사용가치를 다한 물체, 즉 쓸모없는 재료인 폐품과 도시의 폐기물 등으로 구성된 정크아트(Junk art)의 또 다른 시도로 보여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정크아트가 쓰다버린 기계부품과 못쓰게 된 들보 재목이나 녹슨 금속뿐 아니라, 찢기고 더렵혀진 천 조각, 유리병, 연재만화책, 폐기된 자동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산업화된 도시 생활의 파편들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고, 현재도 많은 예술가들이 오브제나 설치를 통해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결수의 오브제가 고철이나 폐기된 들보 재목 버려진 나무도마 등 폐기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크아트’와의 유사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가 제시하는 오브제에 담긴 의도와 방법에 자신만의 독자성을 담아내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우선 그가 선택한 오브제는 쓰다 버려진 폐품을 통해 산업사회에 대한 비평적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효과’의 흔적을 통해 피와 땀이 서린 노동의 가치를 환원해 보려는 노동에 대한 메타포를 담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의 흔적이 깃든 대상이자, 사용가치를 다하고 낡아서 버려진 대상(그림자)에 정성스럽게 하얀 옷을 입히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노동의 흔적은 곧 노동의 그림자고, 흔적이 스민 오브제에 입힌 하얀 옷은 백색 공간인 갤러리 공간과의 관계를 보는 그의 시선이다. 이러한 시도는 ‘노동-효과’를 통해 바라보는 김결수의 노동의 빛과 그림자를 보는 방식이자 그의 작업의 출발점이다.
어느 날 우연히 들렀다 목격하게 되었던 포장마차에서 일어난 사건은 마땅히 가져야 할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은 “어느 날 내가 자주 다니던 도로 옆 포장마차가 폭격이라도 맞은 듯 폭삭 내려 앉아 있는 것을 목격했지요. 가끔 들러 소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아주머니가 하던 포장마차여서 무심히 지나쳐 지질 않아 철거 중 다툼에 의한 것인지, 취객들의 싸움 때문이었는지 의아해 하며 지나다가 그 잔해들 속에서 도마 하나를 보았는데, 양쪽으로 사용된 나무도마가 가운데가 패여 구멍이 날정도면 얼마나 긴 시간 도마 앞에서 칼질을 했을까? 얼마하지도 않는 도마를 새것으로 바꾸지도 않고 툭 치면 부서질 것 같던데...”라며 이어갔다.
다음날 신문의 모서리 기사에 실린 내용은 잠시 서성이며 바라보았던 ‘나무도마’의 주인을 새벽 음주 차량이 인도 위 포장마차를 덮치면서 도마 주인의 생명도 함께 앗아 갔다는 것이다. 음주운전 차가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살아가던 아주머니의 일터와 생명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렸다는 기사를 보자 삶이 노동일 수밖에 없었던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나무도마’가 아주머니에게 얼마만한 노동의 효과를 주는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2003년에 ‘노동-효과’라는 테마로 설치전을 했던 것도 ‘나무도마’에 대한 애잔한 시각에서 출발했다. 노동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이처럼 애잔한 여운을 품고 있다.(2003년 대구문화 예술회관에서 전시되었던 설치작, <work-1>,<work-2>,<work-3> 그리고 <labor-effectiveness> 등) ‘나무도마’에 대한 애잔한 시선이 담긴 오브제의 표현방식은 2004년 이후 점차 간결해진다. 하지만 그의 간결성은 극단적인 간결성이나 기계적인 엄밀성과는 구별되는 갤러리 공간에 대한 그의 해석이 담겨있다.
김결수의 근작에서 보여 지는 ‘간결성’은 갤러리의 안과 밖,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우리의 실상과 허상을 담는 하나의 기술로 보여 지는데, 이 간결한 기술은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오브제에 백색공간으로 대변되는 갤러리 공간의 단면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오브제에 그는 하얀 옷을 입히고 낯선 백색공간에서 어색한 만남을 주선한다. 어색한 만남을 지우기 위해 그는 오브제의 일부분에 하얀 옷을 입히고 갤러리 공간과의 친밀한 관계로 변모시킨다. 작가의 질문이 담긴 오브제가 입은 것은 하얀 주검의 옷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새 생명의 옷이 된다.
낡아서 버려진 폐기물의 흔적은 노동의 효과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고, 폐기물에 담긴 흔적(주검의 그림자)의 일부에 하얀 옷(생명의 빛)을 입히는 것은 사멸한 공간에 생명을 부여해 가는 작가의 의식행위이자 그 결과다. 또한 그 하얀 옷은 곧, 갤러리의 백색 공간과 연결되는 지점이 된다. ‘노동-효과’의 빛과 그림자의 상반된 메타포를 내포한 채 새 생명의 옷을 입은 오브제는 백색의 갤러리 공간과 만나는 접점에서 태생의 차이를 안고 포개지거나 겹쳐지면서 하나의 공간에서 상호교환 가치를 환원해 간다.
그림자가 없는 백색공간은 갤러리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김결수는 폐기된 오브제를 통해 백색 공간 입기를 감행해 간다. 어쩌면 위압감마저 느끼는 백색의 입방체 공간을 그는 폐기된 물체들로 옮겨 놓는다. 이 같은 그의 시도는 분명, 하얀 입방체 내부의 세계와 외부 세계와의 단절된 공간을 연결하려는 시도로 읽혀지기도 한다.
갤러리의 백색 공간에 들어서면 현실과 격리된 것처럼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의 말이 아직 유효하다면, 그런 경험을 하는 이들이 주위에 적지 않다면, 여전히 하얀 입방체의 갤러리 공간은 현실과 유리된 그 어떤 이상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이 적지 않다. 저자이자 미술가인 브라이언 오 도허티는 <하얀 입방체 안에서 : 갤러리 공간의 이데올로기'(Inside the White Cube : The Ideology of the Gallery space.1999)>라는 책에서 “하얀 입방체라는 갤러리 공간은 과거를 말끔하게 지우는 동시에 현존과 권력의 초월적 양식에 호소함으로써, 미래를 지배하고자 시도하는 과도기적인 장치”라고 한다. 또한, “현대미술관의 방화호수가 그저 방화호수가 아닌 하나의 미학적 수수께끼 같은 사물로 보이듯, 미술관에 세워진 재떨이 역시 거의 신성한 사물이 된다. 그림자가 없는 하얗고 깨끗한 인공적인 공간은 미학이라는 기법에 전적으로 봉사한다.” 이처럼 “미술은 전시(Display)라는 일종의 영원성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삶으로부터 우리의 지각을 형식상의 가치로 완벽하게 전환시킨다는 모더니즘의 단점 중의 하나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갤러리 내부의 세계는 갤러리 외부와 단절된 그 어떤 진공 상태임엔 분명하다. 예컨대 모더니즘의 정점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이기도 한, 미니멀리즘이 환영주의와 지향성 사이의 유사성을 제기한다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주장인, 하나의 관념이 되려는 지향(intention)을 위해서는 의식의 환영주의적 공간이 반드시 설정되어야 한다는 점(이점은 핼 포스터Hal Foster가 미니멀리즘의 인식을 다시 모더니즘 위에 투사하는 것으로 그녀의 견해를 비판하는 지점이기도 함)은 시사 하 는바가 많다.
진정한 리얼리티를 찾으려는 미니멀리즘의 노력은 '실제로 체험하는 공간'을 하나의 예술 세계로 제시하며 공간이라는 화두를 현대미술에서의 중요한 주제로 부각 시켰지만, 그러한 지적자극이 의례적 공간을 해체했다하더라도 관람자는 작품의 표면을 훑으며 그 작품의 매체가 주는 속성 보다는 주어진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정한 개입의 지각적 결과만을 탐색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듯 오브제가 백색의 갤러리 공간에 전시라는 일종의 영원성 안에 존재하는 한, 이 영원성은 갤러리 공간을 문화적 망각지대(Limbo, 지옥과 천국 사이에 있는 연옥)라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 같은 갤러리 공간에서는 눈과 정신만 있고 신체는 사라진다. 이를테면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데카르트적 역설만이 남는다.
김결수의 근작들은 그림자도 없는 백색 공간의 갤러리가 주는 망각지대를 확장시킨다. 그 확장은 갤러리 공간에 노동의 그림자 드리우기를 통해서다. 삶의 흔적들이 녹아든 오브제에서 발견한 노동의 그림자는 갤러리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그 고리는 갤러리 안과 밖, 그 사이 ‘어디’(site)인가에서 우리의 실상과 허상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그의 ‘노동-효과’는 진공 상태에 있는 백색공간을 입고 실상과 허상이 교차 하면서 갤러리 공간 속으로 녹아든다. 갤러리 공간의 확장이라는 그의 시도가 오브제에 갤러리 공간을 부분적으로 옮겨 놓는 방식으로 갤러리 공간 ‘입기’, 갤러리 공간 ‘벗기’, 갤러리 공간 ‘되기’를 감행해 간다.
‘노동-효과’를 통해 시도하는 김결수의 감행은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성 오브제로서의 이행이다. 그의 오브제가 주는 컨텍스트성이란, ‘그리고’, ‘그래서’라는 순접(順接)이 아닌, ‘그러나’와 같은 역접(逆接)이 전제된다.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나무도마’가 아주머니에게 얼마만한 노동의 효과를 주는 것이었을까? 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나무도마’는 존재했다. 그러나 생각하지는 않는다’와 유사한 맥락을 지니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다. 이 같은 역설은 사용가치를 다한 오브제를 통해 ‘노동-효과’를 제기하는 김결수의 작업이 지닌 매우 가치 있는 시도이다. 오브제에 입힌 백색 공간은 갤러리의 백색 공간과 두 가지 점에서 동일하다.
하나는 갤러리 공간에서 상호작용하는 백색의 상징적 의미다. 예컨대 ‘하얀 옷’으로 말해진 오브제의 백색공간이 지닌 ‘사멸의 메타포’와 갤러리의 백색 공간이 지닌 ‘망각지대(Limbo)’로서, 다른 하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망각지대가 하나의 공간에서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 힘들이 서로 교차하게 된다.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간의 관계가 내부의 힘을 통해 자체의 응집력을 가지고 상호 새로운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두 개의 서로 다른 백색 공간은 하나의 공간에서 만나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사건 현장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의미화 한다는 것은 갤러리 공간과 오브제의 백색이 서로 연결되어 상호 관계를 서로 투영하는 연속적인 환원효과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해 각자의 의미가 되살아나게 된다는 의미에서 타동사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결수의 오브제는 철저히 갤러리가 전제된 오브제, 즉 그림자가 없는 백색공간에 피와 땀이 스민 노동의 흔적이자 그림자가 담긴 오브제에 새로운 빛을 투사하는 것이다.
오브제로 제시되는 현대미술가의 모험은 오랜 시간 공고히 쌓은 탑들을 모방하거나 전복하면서 갤러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도전과 응전을 하고 있다. 삶의 모든 영역이 미술의 재료와 장소가 되면서 미술의 한계는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어쩌면 이러한 미술 영역의 확장 혹은 과잉이라는 순환의 틈새에서 김결수는 ‘노동-효과’라는 오브제를 통해 엄연히 존재하는 백색공간의 과도기적 장치(과거를 지우고 현존을 위한 장치)가 주는 거리감을 그의 삶 언저리에서 발견한 물체를 통해 상호관계 지움으로써 갤러리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고리를 던져 놓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던져놓은, 백색공간이 문화의 망각지대가 아니라 생생한 삶을 환원해가는 공간이라는 고리에 난 걸렸다.
작가들이 던져 놓은 질문에 대한 응답은 침묵과 무반응일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다양한 방식의 기투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역시 예술가의 몫이다. 예술개념의 확장이나 문제제기는 예술의 수동적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 폭넓은 시각과 깊은 사유를 갖게 한다. 김결수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나무도마’가 아주머니에게 얼마만한 노동의 효과를 주는 것이었을까?”라는 문제에서 출발해서 오브제가 주는 예술적 확장의 가능성을 매우 간결하게 달성해 내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개인적 감수성이 하나의 공간에서 객관화 되었을 때, 작가의 독창적인 감성의 시선은 새롭게 제시된 소통방식을 통해 시각문화와의 여러 접합지점과 상호교차를 통해 수많은 연결고리들로 이어질 것이다.
김결수의 ‘노동-효과’는 오브제와 공간이라는 관계를 통해 하나의 문제제기를 달성한 셈이다. 문제제기 방식이 백색 공간 내에서 자기 환원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어 공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것 이상으로 공간 내의 소통의 확장 역시 고민해야할 숙제로 남기는 하지만, 적어도 백색 공간이 지닌 어떤 고답적인 제약들을 그 자신이 경험한 삶의 고민에서 출발해서 사유의 영역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음은 시사 하는바가 크다.
계속해서 기대가 생기는 이유는 삶의 언저리에서 애잔한 시선으로 건져 올린 김결수의 오브제가 제한된 공간논리 밖으로 던져져 삶과 예술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다시금 ‘노동-효과’에 대한 의미 있는 물음을 던져놓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